한스큉, 그리스도교 (3)

 #. 한스큉, 그리스도교 (3)
 
유다인들이 또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여, 135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모든 유다인들이 추방되고 예루살렘은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와 함께 예루살렘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어린 그리스도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우뚝한 지위도 종말에 이르렀다. 그 공동체의 영광은 이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넘어갔다.(147)

<2.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1. 인식의 변화 : 이방계 그리스도인

패러다임의 전환은 대게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대 패러다임이 역사적으로 관철되기까지는 오랜 성숙기가 필요하다. 초창기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이 대체된 이방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역시 3~4세기에 홀연히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상황들을 통해 이미 1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 팔레스티나의 예수 운동은 뿌리박힌 시골 환경을 벗어나 도시적 현상이 되어갔고, 유다인 그리스도교가 시골에서 사용되던 오래된 민중어 '아람어'는 이제 이방인 그리스도교 속에서 제국의 만국 공용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p.164) 거기에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은 두말 할 것 없이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헬레니즘 교육을 받은 소아시아 출신의 로마 시민이었고, 유대의 랍비교육과 성서주석 뿐 아니라 주위의 헬레니즘 세계의 관념과 표상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울의 사역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혼합 공동체 속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온 세상의 메시아로 선포해야 할 소명의 자각으로 귀결되었다.

i.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인식변화
1) 새로운 성서 이해 : 이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를 거리낌없이 그들의 헬레니즘적 맥락 안에서 읽었다. 과연 바울로는 좀 이른 동시대인이요 역시 디아스포라(해외 유다인 집단 거주지)출신인 헬라계 유다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처럼 이미 구약성서를 우의적, 상징적으로 해석했고, "문자"보다 "영"에 우위를 부여했다. 2) 새로운 율법 이해 :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의식율법은 자신들과 아무 관계 없다고 생각했고, 할례나 할라카에도 전혀 의무감을 느끼지 않았다. 3) 새로운 하느님 백성 이해 : 애당초 선민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공동체 구성원이 되는데 결정적인 것은 결코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에 의해 봉인되었다.(169)

ii. 반유다주의
1) 교회는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헬레니즘화, 교의화하다보나 뿌리인 구약성서적 토양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졌다. 2) 교회가 회당 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 멀리했으니, 그런 상황에서는 교회라는 것이 대개 호교론적 독백으로 끝났다. 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책임이 이제는 전칭적으로 '유다인들'에게, 즉 모든 유다인에게 들씌워졌다. 유다인들이 배척받고 사방으로 흩어진 것은 하느님이 저주받은 민족에게 내리신 마땅한 형벌로 간주되었다.(249-250)

2. 제도의 변화 : 교회의 제도화

유다계 묵시묵한적 패러다임 에서는 종말 임박의 시대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구조들은 임시적이었다. 임박한 예수 내림을 기대했던 바울 공동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 바울 공동체들은 자유로운 카리스마적 '봉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봉사에는 직분의 '계층'의 구별이 아닌 직분을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만 있었다. 즉 군주제적 주교직이나 사세직, 서품식의 구별은 임박한 종말에 관심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대신 이제 로마가 그리스도교계의 중심이자 우두머리 교회가 되면서, 사제들이 이끌어가는 공동체 조직 대신 갈수록 제도화되어가는 사제-주교 교회제도가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제-주교 교회제도는 우연이나 변태가 아니라  헬레니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의 일부이며, 또 그로 인한 역사적 전개과정의 산물이다.(p. 180~2)

i. 모든신자의 동료성 -> 군주적 1인 주교직
-1 단계 : 지역에 터잡은 사제-주교들이 예언자, 교사 그리고 그밖의 카리스마적 봉사자들을 제치고 주도적인 그리고 마침내는 독점적인(성찬례 거행에 있어서도) 공동체 지도자들로서의 위치를 확고히했다. 여기서 문제점: 모든 신자들의 "동료성"은 점차 약화되고 , 공동체와 마주하여 특정 직권자 동아리들의 동료단이 갈수록 부각되었으며, 그리하여 이미 일찍부터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구분이 생겨났다.
-2 단계 :공동체의 많은 동료 사제들을 마주하여, 갈수록 군주제적 1인 주교직이 도시에서 관철되었다. 대표적 예, 안티오키아 주교-사제단-부제(봉사자)  / 이제 한 명의 주교와 그의 사제단 및 부제들의 동료성이 갈수록 부각되었으며, 그리하여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분리가 결정적으로 관철되었다.
-3 단계 :도시에 있던 교회가 시골에까지 확장됨으로써, 도시 교회의 우두머리였던 주교가 이제 교회 관할지역 전체 곧 교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즉, 오늘날 의미의 주교가 된 셈인데, 이제 주교의 "사도 계승"은 후계자 명단의 계승 차례를 헤아림으로써 역사화,정식화,표면화되었다. 주교와 사제단의 동료성 외에 이제는 개개의 군주적 주교들 상호간의 동료성뿐 아니라, 비록 서방에서만 해당되지만, 로마 주교와의 결속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180~2)

ii. 실존적 예수추종 -> 가르침의 수용.
어느 결엔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묵시문학적 관점이 (민중들에게 널리 퍼진, 세계 심판 전에 1천 년동안 다스린다는 메시아의 "천년 왕국"에 대한 희망은 제외하고) 극복되었다. 그 대신 이제는 구원사적 관점이 널리 힘을 얻었다 :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시간의 끝이 아니라, "시간의 중심"이다. 예수와 하느님 나라 도래 사이에는 필경 제법 긴 중간시기가 정해져 있으니, 곧 교회의 시대다. 교회는 그동안,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다인들의 교회에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로 변했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유다교적 원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갈수록 헬레니즘화,제도화,안정화되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실존적인 '예수 추종'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갈수록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세상과 인간에 관해 '계시된 가르침'의 수용으로 이해하게 되었다.(192)

3. 교회내 위험에 대한 수호

그리스도인 내에 영지주의로 대표되는 혼합주의와 신비주의는 역사-신화적 분리, 육체-영적 분리, 십자가-부활에 대한 해석왜곡하면서 교회 내/외부적으로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왔다. 이에  대응하여 기독교인들은 1) 어떤 저작에 순종해야 하는가? : 신약정경의 범위, 2)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 범교회적 신경 확립, 3)누가 이 가르침을 지킬것인가? :연속을 지닌 전통의 역할, 의 중요한 문제에 대답을 해야 했고, 이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교 안에 다양성과 상이성들이 조직된 구조로 정리되어져 갔다.

i. 초기 그리스도교계는 영지주의 교설의 홍수에 어찌 대처했던가? 대답:어떤 경우에도 폭력이 아니라, 확고한 척도들에 터해 대처했다. 이 원칙들은 근본적으로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규범들은 2세기 후반들어 "가톨릭 교회"와 이단과의 경계설정을 위해 정식으로 확립되었고, 그 기원을 (이미 매우 이상화된)사도들에게 도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도적"이라고 선언되었다. 3세기 대교회에 이정표를 제시했던 인물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와 법률가이자 교회 라틴어 창시자인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 였다. 이러한 경계설정에는 세 가지 병행 과정(신앙고백의 규범화, 정경확정 ,군주제 주교직)이 내포되어 있었다. (205)

ii. 세가지 원칙
1) 신앙규범 : 세례 때 바치던 그리스도께의 신앙고백으로부터 아버지, 아들, 영에 대한 3중 고백이 생겨났고, 이것이 4-5세기에 마침내 오늘날의 사도신경으로 발전했다. 또한 신앙의 규범은 갈수록 성서 해석을 위한 준칙이 되었는데, 다른 한편 이 규범 역시 오직 성서에 바탕을 두었고 도 성서에 터해서만 해석될 수 있엇다. 이 신앙규범으로부터 고대교회의 교의들, 특히 그리스도론 및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교의들이 발전되어 나왔다. 2) 정경확정 : 구약성서를 고수하는 한편, 이제는 신약성서 정경 확정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도적 원천이라는 척도에 따라 "정경적"인, 공시적인 신약성서 문허들이 선별되었다. 3) 군주제 주교직 : 신앙규범과 성서 정경 외에 셋째 원칙이 첨가되었는데, 그것은 분쟁이 생길 경우 신자들은 예전에 사도들이 활동했던 가장 오래된 교회들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주제 주교직인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일치의 중심이었거니와 이제 교도권으로 발전했다. 사도들로부터 중단 없이 이어져온다는 이른바 사도계승을 바탕으로 신자들은 주교의 교도권이 참된 사도적 가르침에 관해 내린 결정이라고 신뢰했다.

표준적 신앙규범, 성서 정경, 주교 교도권 이 세 원칙에 터해 견고히 결합된 가톨릭 대교회는, 이제 언제 어디서나 세 원칙에 비추어 참된 사도적 가르침을 발견,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앙규범-정경-주교직의 확정과 더불어 단일한 고대교회의 보편적 패러다임은 자신의 세가지 전형적 척도를 확보했다. 이로써 묵시묵학적 유다계 그리스도교 패러다임은 결정적으로 대처되었다. (207)

4. 그리스도론의 전환.

헬레니즘의 그리스도교화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하느님 아들의 선재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던 유다계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갈수록 쇠퇴한 반면, 말슴의 선재와 육화에 관한 진술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서 머리말이 강력하게 대두되엇다. 그리스도의 보편적 의의를 동시에 강조하기 위해 유다계 헬레니즘으로 꼴지어진 요한복음서의 '로고스' 개념을 그리스도의 로고스 형이상학과 결합하시켯을 때, 패러다임의 전환은 뚜렷히 나타났다.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 세상에서 활동하다 고양된 '역사의 그리스도'에서 '선재하는 그리스도'로 옮겨졌다. 예수의 삶은 육화의 그림자로 가려져 버렸다. 그들은 그리스도론을 우주론과 결합시켯으나 구원론과는 연결시키지 못했다.(233)

i. 그리스도론의 구체적 특징
1) 묵시문학적-시간적 구원도식(예수의 지상생활-수난-죽음-부활-재림) 안에서 사유하는 대신, 이제는 우주적-공간적 도식(구원자인 하느님 아들의 선재-하강-상승)안에서 위로부터 아래로 사고를 전개했다. 2)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성서적-구체적 표현방법(예수의 말씀, 이야기, 찬가, 세례, 고백)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제는 당시 헬레니즘 형이상학의 존재론적-본체론적 개념들을 통해 설명했다. 3) 이 세상 역사에서 아들을 통해 영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역동적 계시활동을 계속 더 깊이 고찰하는 대신, 성찰의 중심이 당신의 영원성 안에 계신 하느님 자신과 그분의 내밀하고 유한 본성에 대한 정태적 반성, 그리고 하느님의 세 형상의 선재문제로 옮겨졌다. (234)

ii. 그 이후(이냐티우스) 신학의 근본 관심사는 구약성서적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지위와 주권보다는 헬레니즘적으로 이해된 그분의 기원이었다. 아래로부터 출발하여 죽음과 부활에 중심을 두는 고양 그리스도론은 위로부터 출발하는 육화 그리스도론에 의해 갈수록 밀려났다. 구원자의 기능보다는 본성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본질,본성,본체,실체,위격,일치 같은 개념들이 갈수록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지칭하고 그에게 기도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교 전통에 터해 하느님의 단일성과 유일성은 어찌하든 고수하려 했으니, 양자간의 모순해결이 갈수록 신학의 핵심 난제로 대두되었다. (235)

5. 국가종교와 국가권력

박해박던 교회가 박해하는 교회로 변하는 데는 채 백 년도 걸리지 않았다. 교회의 적은 이제 제국의 적이기도 했으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정치 제도와 종교적 신념뿐 아니라, 철학 사상과 문화 예술 안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바야흐로 제국교회의 권력자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i. 공의회 소집.
동방 전체에 번져나간 이 교회 내의 싸움(아리우스 논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매우 불편케 했으니, 그 싸움은 그에 의해 마침내 정치적으로 재통일된 제국을 정신적으로 분열시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중재 시도가 무위로 끝나자,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주교들을 제국 공의회 곧 보편 공의회로 소집하고, 공의회를 위해 니코메디아의 황제 관저 부근 니케아에 있는 화려한 궁전 대강당을 내주었다. ... 누가 보편 공의회에서(이때뿐 아니라 그후에도!)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지는 처음부터 분명했다:그것은 절대적 교황권을 옹호하는 후대 이데올로그들이 종종 강변하듯 교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제 한 사람이었다: 황제는 보편 공의회를 소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전권을 위임한 주교를 통해 공의회를 주재했고, 정회,폐회도 결정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최초의 공의회를 특히 교회조직을 제국 조직에 맞추어 정비하는데 이용했다. ...제국은 바야흐로 자신의 제국교회 를 갖게 되었다!(p244)

1) 니케아 공의회 (AD. 325)
알렉산드리아 장로인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 하나님의 첫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콘스탄틴 황제는 제국 내에 모든 교회의 감독들을 초청하여 아리우스파의 이단 교설을  밝혔고,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2)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AD. 381)
교회의 두번째 공의회.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가 인간의 육체를 지녔지만 인간의 정신은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를 탄핵하고 니케아 신조를 당시 강조, 승인했다.

3) 에베소 공의회 (AD. 431)
교회의 세번째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주의(예수가 두개의 분리된 인격, 즉 인간의 인격과 하나님의 신격을 가졌다는 사상)를 탄핵하고 비난했다.

4) 칼케돈 공의회 (AD. 451)
교회의 네번째 공의회. 단성론(그리스도가 한 가지 본성만을 가졌다고 주장. 예수의 신성이 인성을 완전히 흡수했다고 주장.)을 탄핵하고 정죄함. 칼케돈 공의회에 참석한 감독들은 그리스도께서 두개의 본성 (하나는 신의 본성,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소유한 하나의 인격이라고 고백함

ii. 황제의 개입.
키릴루스는 주저할 줄 모르는 권력 정치가였으니, 새 공의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리낌없이 선동과 조작을 일삼았다. 431년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에페소 공의회로 하여금, 콘스탄티노플에서 네스토리우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적수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을 단죄토록했다... 교황 레오 1세는 지나치게 '교황처럼' 처신하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쿠루스를 파면하기로 작정하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굴욕적인 심리를 거쳐 파면시켰다... 이로써 황제가 제 생각에 그럴싸한 그리스도론적 언명들을 공의회에 명령할 수 있는 길이 곧장 열렸다. 그리하여 키릴루스의 입장도, 네스토리우스의 입장도 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서방-라틴 그리스도론이 부각되었다. (256-7)

iii. 비잔틴제국 - 국가교회
요컨데, 동방에서는, 훗날 서방과 달리 교회국가가 아니라 국가교회가 생성 발전했다. 황제의 지배권은 헬레니즘 비잔틴 패러다임을 특정지었거니와, 콘스탄티누스 이후 이 패러다임에서 헬레니즘과 국가 교회주의가 로마 황제의 신권정치에 의해 결합되어 나타났다. 인류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하나되고, 황제 아래 하나의 정치적 통일체로 결합했다. 하나인 제국, 하나인 법, 하나인 교회로 대표되는 교회와 국가의 긴밀하고 "조화롭고" "교향악스런" 결합 안에서 국가와 국가의 최고대표자는 수백 년간 다듬어져온 엄숙한 예식과 거룩한 종교적 상징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과 뚜렷히 구별 부각되어, 막강한 권력을 보유했다. 이것은 비잔틴으로부터 차르가 절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모스크아에 이르기까지, 헬레니즘 비잔틴 패러다임의 한가지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77)

.
.
.
* 인상깊게 느낀점.

1. 인식의 변화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리스도교 책이 좋은 이유라면, 변화의 나열이 아닌 변화의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인식의 변화는 1)땅을 통해 ( 팔레스티나의 작은 마을에서 로마제국과 헬레니즘 문화의 대도시의 전환 ) 찾아오고, 2) 언어를 통해 ( 서방으로 대표되는 라틴어와 동방으로 대표되는 그리스-헬라어 ) 발전되며, 3) 문화를 통해 ( 서방의 라틴적 형태는 합리주의적 전통아래 셋을 하나로 귀속시키는 일체성을 지향하고, 동방 그리스적 형태는 신비주의적 전통아래 하나와 셋 사이의 등가-위계성을 지향한다. 이는 서방의 가톨릭 권력주의와 동방의 정교의 민족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확장되어 나간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단순한 연대기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세기동안 뿌리깊게 형성되어 왔던 삶의 양식과 대처방식에 연관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수난불가설과 삼위일체 논쟁이 순수하게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속에서 일찍이 대두되었던 우주론과 존재론의 철학적 논쟁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짐(예수추종이 가르침으로, 묵시-시간적 구원도식이 우주-공간적 도식으로 전환)은 변화는 축적된 논의의 변형적 변증이 불가피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2. 권력에 따른 상대적 소외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관습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변화에 결정적 요인 중, 교회정치를 향한 권력의 역사를 간과할 수 없다. 교황권의 점진적 강화와 서방에서 점직으로 형성된 군주제적, 절대주의적, 중앙집권적 단일교회의 입장은 오늘날 카톨릭의 표준으로 읽힌다. 하지만 동방 정교회의 교회관은 한 사람의 세계주교로부터가 아니라, 언제나 신앙인들의 '친교(공동체)'로 부터, 지역교회들과 그 주교들로부터 출발하지, 로마인들처럼 법률에 목매는 짓은 하지 않는다. 교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교회법적'이 아니라 '성사,전례, 신경들'이었고, 교회는 자신을 동료관계에 의해 질서지어진 개별교회들의 연방적 공동체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역사는 이후 십자군 전쟁과, 세계 역사속에서 로마의 수위권과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교회체제를 동방에도 관철시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은 주의해서 봐야할 점이다. 동시에 동방 정교회의 경직화와 고립화는 어쩌면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하는 서방의 정통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있는 반항이었다는 점 또한 주의해서 봐야할 점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스큉, 그리스도교 (5)  (0) 2017.07.24
한스큉, 그리스도교 (4)  (0) 2017.07.24
한스큉, 그리스도교 (2)  (0) 2017.07.24
한스큉, 그리스도교 (1)  (0) 2017.07.24
제4장. 현대 (1750-현재)  (0) 2017.07.24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