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 그리스도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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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패러다임'의 본질적 전제들은 이미 고대후기에  꼴지어져 있었던 고대교회 헬레니즘(3)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그리스도교 로마제국의 동서분할(395~), 그리스 교부신학과 상이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 신학(430~), 사도 베드로를 끌어대며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교황의 정치(4-5세기) - 다시말해, 비잔틴과 동방의 관점에서 이미 윤곽을 드러냈던 것을, 이제는 가까이 로마와 서방의 관점에 터해 정확히 확장하여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특별히 한스큉은,  중세 패러다임의 근본요소로서 보편성을 희생시킨 서방의 로마화 과정을 꼬집어 살폈다.(그리스도교적 = 가톨릭적 = 로마적)

<3. 중세의 로마 카톨릭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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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배경 : 흔들리는 서방제국

5-6세기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AD. 476년 로마의 서방지역은 폐허로 변했다. 정치적 안정은 침해받게 되었고, 그결과 기독교는 불안정한 시대를 맞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안이 더욱 심화된 것은 7세기 이후에 있었던 이슬람의 침략운동으로 AD. 750년까지 성지점령과 콘스탄티노플 위협까지 심각하였다. 서방교회는 이러한 이슬람의 위협적인 태도는 AD.1095-1204년 동안 십자군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에 이르게 되었다.

1) 봉건제도

중앙정부를 잃은 서방제국은 토지를 통해 부와 권력을 연명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최대한 넓은 장원을 장악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마 기사들을 양성했다. 농부들은 식량과 거주지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영주의 농노로 들어갔고, 영주가 배당하는 농토를 개작하며 식량을 얻을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봉건제도 였다.

2) 이슬람의 등장.

아라비아의 작은 무역항 메카라는 곳에 무함마드라는 한남자는 AD. 610년 가브리엘 천사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참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맡겼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메카에서 자신들을 추종하는 자들(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들)을 불렀고, 그들의 종교를 이슬람(복종)이라고 선포했다.
모하메드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아라비아와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정복했고, AD.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참조 : 고대 지중해 세계에 대한 이슬람 침공은 중세 서방적 패러다임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 제국은 전쟁으로 인해 남쪽과 남동쪽 지역을 상실함으로 서방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약화 되었고, 상대적으로 프랑크 제국에 기댄 서방은 새로운 그리스도교 제국을 건설할 역사적 기회가 주어졌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칼 대제는 필경 무함마드가 만든꼴이 되었다. 

3)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샤를마뉴 황제.

중세가 시작되었을때, 이교도인 프랑크족은 서방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AD. 496년 프랑크족 전투 사령관인 클로비스는 니케아신조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백성들을 기독교로 이끌었다. AD.600년경 프랑크족이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였을때, 로마교회는 프랑크족을 의지했고 AD.754년 프랑크족 피핀 3세는 중앙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로마교회에 바쳤다.

당시 로마교회와 교황 레오3세는 이탈리아 귀족들에 의해 이미 힘을 잃은 상황이었고, 귀족들이 교회를 통제하려 들면서 폭행을 당하기도 하여 카알왕에게 피신하였다. 많은 비난과 고발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의 카알 왕은 교황 레오 3세가 결백하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교황 3세는 성탄절에 카알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며 "평화로운 최고의 황제로 하나님께 왕관을 받은 카알 아우구스투스" 라고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로 교회가 황제를 만들어낸 순간이며, 오래전에 멸망한 서방제국에 동방제국과 비견될만한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후대에 사람들이 '샤를마뉴', '카알대제'로 불렀던 사람이 바로 이 샤를마뉴 신성로마제국 최초의 황제였다.(AD. 768-814) 샤를마뉴는 이 칭호를 받은후 자신이 로마의 기독교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생각하며 로마교회가 이탈리아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도록 지원하였다. 

*참조: 서방의 교황직은 프랑크 왕국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동로마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났고, 국가적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이 없었다면 교황을 종교적, 세속적 우두머리로 하는 교회국가(교황령)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교황령이 없었더라면 비잔틴에 맞선 로마의 당당한 세력시위도 없었을 것이다. 즉, 서방 중세 패러다임 형성에 북중 유럽의 정치적 중심이동은 근본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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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열되는 교회. (동서방교회의 분열과 로마화)

9-10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헬라어권역 기독교인들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쪽의 라틴어 권역 기독교인들 사이에 점층하는 긴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최종적인 권력 분열은 일반적으로 AD. 1054년) 그러나 9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과 11세기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으로 서방교회는 기독교를 로마카톨릭 패러다임으로 관철시키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중세의 로마 카톨릭 패러다임은 그후 12-13세기에 정점이자 전환점에 이르렇고, 14-15세기 총제적 위기에 봉착했으며,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와 서방교회의 분열을 통해 그 경직성을 세상에 드러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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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9-13세기 동안 다툼을 벌여왔다. 주요 다툼은 3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1) 니케아신조 수정.

로마교회는 신적본질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안에서 똑같이 거주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신적본질은 오직 아버지 안에만 거주한다고 믿었다.
이 갈등에게 대해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일치를 구하지 못했다. (서방: 한실체와 세 위격-일체성, 동방: 한 본질적 실체와 세 기능적 실체-위계성)

*참고 : 프랑스 삼위일체 교의사 드 레뇽은 하나의 그림을 통해 서방에서 통용되는 라틴적 삼위일체 패러다임과 그리스적 패러다임의 차이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서방 패러다임이 별자리에서는 삼각형을 이루는 세 별이 동일한 차원에서 병렬하여 나란히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적 패러다임에서는 이 세 별이 일직선상에 직렬해 있으며,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 성부는 신성의 원리요 성자와 성령의 근원이고 원천이며, 성자를 통하여 성령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2)훔베르트의 경솔한 교서.

동방교회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주교 미카엘는 서방교회 교황을 인정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동방에서 로마의 주교에게 충성하는 교회를 폐쇄시켰다. 이에 로마교황 부르노는 사절단으로 훔베르트를 파견하여 화평을 청하였지만 동방교회는 이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동방교회의 입장에서 로마 체제는 전세계 그리스도교와 전체교회가 아니라 서방교회 안에서만 관철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이제 교회직이라는 형태를 통해 갈수록 큰 자부심과 권력의식을 드러냈다.
AD. 1054년 훔베르트는 교황의 이름으로 동방의 총대주교의 파문을 선고했고, 이에 비잔틴 측은 즉각 역판문으로 응수했다. 새로운 로마 카톨릭 패러다임은 헬레니즘 고대교회 패러다임과 조화될 수 없음이명백히 드러났다. 로마 수위권의 부상은 고대교회의 주교중심 시노드 구조들의 희생을 대가로 했으니, 과연 이 구조들은 서방에서 거의 다 파괴되었다.  

*참고 : 게르만화->로마화
비잔틴과의 단절과 게르만 왕조와의 긴장은 서방의 오랜염원이었던 로마화의 서막을 알렸다.  AD. 1077년 일명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린 사건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왕 하인리히 4세의 세계사적 대결에 교황이 승리하였음을 의미했다.
시실 이 두 대결은 예견된 일이었는데, 두 개의 전혀 상이한 법률관(하인리히 4세 : 성직 임명권을 통한 게르만적 사유교회 제도 유지, 그레고리우스 7세: 로마적으로 꼴지어진 군주제적 교권제도 확립)의 충돌에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중세의 로마 카톨릭 패러다임을 되돌이킬 수없이 철저히 정치적으로 실현한 교황이었다. 특별히, 그레고리우스의 '교황 지령'은 모든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하느님이 부여하신 권력의 충만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기에 세속권력과의 충돌은 불가피 했다. 이 법령은 1차 바티칸 공의회(1870) 수위권 교의 결정 전까지 교황의 지배수원권에 관한 가장 명확한 법률적 규정이며 교황의 절대적 서품,입법, 행정, 재판권을 주장한다. 

3) 십자군 원정.

AD. 638년 이후 성지였던 예루살렘은 이미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된 상태였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크리스천 순례자들에게 통행세를 받아먹고 있었다.
AD. 1095년 어느날 서방교회 로마의 교황 우르반 2세는 동방교회 형제들에게 이슬람교도들로 부터 빼앗긴 영토를 찾아오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AD. 1099년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되찾았고, 그 안에 있는 남녀노소를 학살했고, 회당에 불을 지르는등 무차별적인 행동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이후 이슬람에게 다시 예루살렘 빼앗겼고 이에 십자군은 4차 원정에 나서지만 본래의 목적가 다른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AD. 1202년 원정에 참가를 약속했던 십자군 중 3분의 1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동방제국의 왕자 하나가 부족한 재정자금을 자신이 대신 매워주는 대가로 동방제국의 황제를 폐위시켜달라고 조건을 내덜었다. 결국 십자군 지도자들은 아비규환의 상황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AD. 1204년, 겉옷에 붉은 십자가 문양을 새긴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노략질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강간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로마에 귀속시키면 교황의 면죄부를 받을수 있다는 말도안되는 이 4차 십자군 전쟁에 의해 교회는 두집단(서방-로마카톨릭, 동방-동방정교회)로 영원히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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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흔들리는 교황직.

12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중세교회 교인들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종교재판과 면죄부와 분열만 안겨주었다. 교회의 대답은 허공을 맴돌았고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에 교황이나 황제는 불신과 권력투쟁으로 서방 전체를 통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통치는 각 나라의 제후들과 영주들의 몫에 가까웠다.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의 교서도, 국왕들도, 어떤것도 믿을만 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비뇽'으로 피신한다.(이를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여기에서 약 72년동안 여러 교황이 중요한 직위들을 거래하고, 아무런 제약없이 면죄부를 팔기도 했다.
이러한 교황의 타락에 반하여 행해진 신비주의 운동(경향)은 기존 교회의 조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직접적인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면 교회가 필요없듯이, 전통적으로 은혜의 통로였던 성례, 설교, 심지어 성경까지도 그 중요성이 악화되었다.

AD. 1347-1350년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흑사병으로 죽고, AD. 1337-1453년간 영국과 프랑스간에 100년 전쟁이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교황 그리고리 11세가 아비뇽에서 다시 로마로 입성한다. 그러나 교황선출 문제를 두고 로마와 이비뇽이 두곳에 두명의 교황이 양립하는 기이한 시대가 40년간 지속되자 AD. 1409년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피사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그때까지의 두 교황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교회는 하루 아침에 세 교황을 갖게 되었다.)  교황 선출을 둘러싼 대분열은 AD.1450년경 종식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더 급진적인 개혁을 향한 운동이 진행되는 여지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진정한 수위권에 의한 교회지배가 결여된 '극단적 공의회 수위설'은 바젤 공의회에서의 분열로 귀결되었고, 공의회에 의한 통제를 거부하는 '극단전 교황중심주의'는 르네상스 시대 교황직의 직권남용과 루터의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참고: 공의회 수위설
교회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은 물론 다른 모든 교회의 권위보다 높다는 신념. 콘스탄츠공의회와 피사 공의회가 주창했다.
특별히 콘스탄츠공의회(AD.1414-1418)는 교회 안에서 원친적으로 최고의 기구는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라는 것이 고대교회의 전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황-로마중심주의적 신학에게는 오늘에르기까지 찜찜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후 1870년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무시를 당하기도 했으나, 다시 1962-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의회 수위설'을 재평가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은, 모든 사람과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오래된 명제가 다시금 현실성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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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마 카톨릭의 개혁.

중세말기, 르네상스는 단순한 예술사적 양식개념이 아니라 정신적-문화사적 시대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인간-자연-세상으로의 새로운 방향전환이었다. 이것은 한쪽으로는 "암흑의" 중세 및 그것의 협소한 신앙세계 그리고 다른한쪽으로는 '계몽된" 근대 및 그것의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으로 이 둘 사이에 자리잡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였다. 
1) 반종교개혁 : 중세 패러다임으로의 복귀.

로마는 참된 개혁을 저지한 대가로 개신교 종교개혁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로마에게는 재앙이었다. 과연 개신교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서 로마제국의 북반부를 앗아갔다. 교황직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수세적 입장에 내몰렸고, 반동의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종교개혁가들이 묵시론적 종말 정서 안에서 고대하던 로마 체제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개신교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꼴지어진 지중해 가톨릭 그리스도교가 형성되었다. 비록 반쪽이 되었으나 로마체제는 갈수록 다원화되어가던 개신교와는 달리, 더욱 엄격히 조직된 교권제도에 의해 절대군주의 정체의틀 안에 결속되어 있었다.

AD. 1545년, 시대적 요구에 의해 개최된 트렌트 공의회는 가톨릭의 내부 쇄신을 향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로 꼴지어진 특정 종파의 공의회로서, 중세적 구체제의 복구를 가져왔다.   

2) 반개신교에서 반근대로.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은 중세 말엽부터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엇다. 중세의 쇄신정신은 이제 호교와 반동의 정신으로 변해버렸다.
공의회 수위설에 대한 반동으로 교황 수위권을 강조했고,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반동으로 성사의 객관적 의미, 교권제도의 권력, 사제직, 라틴어, 독신제, 주교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의 불가지성 영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외적, 가시적 특성을 강조했고,  18세기 국가 절대주의와 19세기 세속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교회를 온갖 권한과 수단을 보유한 "완전한 사회"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다시말해, 로마 카톨릭은 안으로는 똘똘 뭉치고, 밖으로는 담을 쌓는 전략을 택했다. 점증하는 종교적 무관심, 교회에 대한 반감, 불신앙에 맞서, 서로를 떠받쳐주는 교황 지상주의, 교조주의, 마리아 숭배를 새삼 강화함으로서, 중세적-반종교개혁적인 가톨릭의 요새 안에서는 온갖 종류의 민중신심(순례, 성물, 성모기념 축제)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했다.

3) 교황무류권.

시대적 압박에 맞서 점점 사면초가에 빠진 로마의 "교도권"은 자연과학, 성서주석, 민주주의, 사회윤리 문제에서 그릇된 판단을 할수록 저항을 받아야 했다. 그럴수록 로마는 스스로를 위한하기 위해 무류성에 더욱 목매다는 결과를 낳았다.

트렌트 공의회도, 4백년 후 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황의 무류성을 교의로 확정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류성은 19세기 세력을 넓혀가던 자유주의, 반권위주의에 맞서 정치적 복고를 꿈꾸었던 반계몽,반합리주의적 성향과 중세적 국가교회의 존속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교황공경의 정서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비오 9세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제 1차 바티칸 공의회(AD. 1870)에서 "교황은 고유한 정신 교도권적 결정에 있어 무류성의 은사를 보유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교회국가를 보전하는 일은 비오 9세의 희망대로 되지 않았다. 공의회 폐막 두 달 뒤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로 진군해 들어옴으로써, 교회국가는 붕괴되었고, 공의회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로써 교황이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의 중요한 요소 하나가 상실되었다. 또한 교황의 정치적 권력은 약 1천 명의 주민과 모나코 공국의 경우 1/4밖에 안되는 면적을 지닌 난쟁이 나라에 대한 지배권으로 축소되었다.

참고: 요한 23세(1958-1963) 및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온갖 어려움과 로마 체제의 갖가지 방해에도 불구하고 새 시대를 여는 변혁의 시작을 알렸다.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근대 패러다임의 전환을 체험, 수용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근본 특징을을 자신 안에 통합해내려는 시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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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깊었던 부분. (p. 648-9)

베드로 재치권적 수위권으로 상징되는 로마 패러다임의 교황 수위권 논쟁은 한편으로는 성서주석학과 역사학의 관점에서 거의 극복할 수 없는 난점에 봉착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수위권의 계승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위권의 계승은  제한적으로, 베드로의 증언과 정신의 계승으로서 교회의 일치와 건설을 참으로 실천하는 봉사의 수의권의 계승 한에서, 성서와 상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서에 상응하며, 의미심장한 것이 될 수 있다. 
베드로 직무는 우선적으로 개별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진력하고, 동시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표자로서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뿐인 세상의 전체 그리스도계를 대표하는 목소리로서 봉사해야 한다. 그러한 사목적 봉사 수위권에 대해서는 정교와 개신교의 많은 신학자들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전세계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염려하는 사람들, 참된 가톨릭성을 실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로마 체제의 교의적, 율법주의적 자기속박을 복음에 비추어 비판적이고 동시에 책임성있게 재고하길 고대하고 있다. 
 
- 한스큉, 그리스도교 중세 패러다임을 정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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