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 그리스도교 (6)

#. 한스큉, 그리스도교 (6)
 
4.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ii)에라스무스와 칼뱅.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상은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변화하고, 또 흔히는 시류에 영합하여 나타난다.  종교개혁의 패러다임도 마찬가지다. 로마가 강요하고, 조장하던 '제도적 관행과 구조들'에 맞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개혁하려고 했던 종교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배태하고 있는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로마(첫째세력)'와 '비텐베르크의 루터(둘째세력)' 외에 '셋째 세력'은 없었을까? 루터의 종교개혁의 회의적 또는 미완성 평가로서 루터이전의 이미 있었던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루터 이후의 아직 완성되지 못한 '제네바의 칼뱅'을 그 대안적 세력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혁의 역사가 가르쳐준 이 두 세력의 강조점은 종교개혁의 패러다임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1.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 전기 작가 롤렌드 베이턴은 그를 '자유주의적 가톨릭 개혁운동의 대변자, 교화의 조언자요, 유럽의 스승'이라고 칭하였다. "원천으로 돌아가라!"는 표어로 대변되는 그는 성서이해에 있어서 스콜라 신학 대신 교부들을 따르고, 교회법,교의, 체계가 아니라 성서와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도록 함으로써, 극히 사변적이고 고상했던 그리스도론을 복음서가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원천적 복음으로 전향해야 함을 강조했다.

  인문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에라스무스의 활동의 목적은 성서에 터한 교회, 신학, 민중신심의 쇄신이었다. 그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가톨릭 그리스도인으로서, 가톨릭 교회를 안에서 개혁하려고 하였다. 에라스무스가 교회의 개혁을 위해 제안한 내용을 다섯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때까지와 다른 성서학 : 성서의 우의적, 은유적인 영적 의미를 찾아내려 애쓸 것이 아니라 해석의 바탕이 되는 언어의 본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해야 한다. 에라스무스는 수백년간 특정계층에게 사용되어왔던 라틴어역 불가타 성서를 그리스어로 한층 더 정확히 번역하라고 노력했다

2) 그때까지와 다른 조직신학 : 교회의 사도적 원천과 관계없는 교의, 법, 관행은 비판되어야 하며, 모든 신학 작업은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 그리고 인간 구원의 길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였다.

3) 그때까지와 다른 민중신심 : 자꾸 늘어나는 미사와 순례, 고해성사의 남용,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폐해에 대한 비판을 통해, 평신도 식자층에게 참된 예수를 이해하는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가 바울서의 의인론에서 출발했다면, 에라스무스는 복음서의 예수로부터 출발하였다)

4) 그때까지와 다른 성직자들 : 수도회 규칙이 복음보다 의미심장하며, 수도회의 체면이 예수추종보다 중요하고, 수도회의 이름이 세례보다 막중함에 대한 비판을 하며, 그때까지의 이상적 신심에 대해 근본적인 의미를 제시하였다. 하나요, 동일한 세례를 받았기에 성직자와 평신도의 근본적 구별을 폐기되었고, 시대에 걸맞고, 모든이에게 타당하며 그리스도교적, 예수적인 것에 집중된 일상전 신심을 옹호 장려하였다.

하지만, 에라스무스의 개혁 프로그램은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 결정권자들에게 적시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루터의 돌발사건으로 인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에라스무스는 '인내하라는 충고'와 교황이나 군주들을 '자극하지 말라는 경고'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루터를 지지하며. 반대글을 쓰라는 로마를 비롯한 교회 당국의 거듭된 요구를 거절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갈수록 과격해지는 방식으로 개혁하는 루터의 방식에 대해 동조하지 않았다.

세간에 두마음과 두 입을 가진 기회주의자라는 의혹과 비방을 받기도 했던 에라스무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양 진영의 '화합'과 '일치'의 상징을 꿈꾼 개혁가로 남아있다. 종파적 증오심을 눈앞에 보면서도, 역사적 타당성을 외친 에라무스의 개혁 프로그램이 만약 때 맞추어 수용되었다면, 비극의 역사로 남아있는 교회분열을 막을 수 있었을까? 천성적으로 온유하고 신중했던 에라스무스는 그 시대의 온유하지 못한 영웅들 가운데 어쩌면 참을성있게, 상호이해를 통해 대립을 완화-제거하려 했던 유일한 일치운동자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2. 칼뱅

기대와 달리 루터의 종교개혁의 원천적 열정과 감격을 사그라들고, 변해야할 매우 많은 것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개혁은 갈수록 거세어지는 정치적 저항에 봉착했다. 황제의 군사적 제압에 맞서 제후의 동맹구조(슈말칼덴)의 비호를 받아야 했던 개신교 세력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제후의 종교는 곧 그 신민의 종교'라는 역설을 견뎌내야 했다. (제후들은 비상시 루터의 동의하에, 주교들로 행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주인이 된꼴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좌파 종교개혁'으로 급진적 일탈자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다른한편으로는 '우파 종교개혁'으로 교황대신 공권력이라는 지배체제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루터는 로마와 관신자들과 폭도들이 야기 하는 온갖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자, 교회를 수호하고 교회질서를 유지하는 의미를 제후들에게 귀속시켰다. 루터교 세력권에서 가톨릭 주교들과 재치권이 사라지자, 비상시 주교인 제후들이 곧바로 최고 '사목자'가 되어, 마치 주교들처럼 교회의 입법, 사법, 감독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고, 귀속된 교회 재산, 특히 폐쇄된 수도원들을 마음대로 처분했으며, 그러한 일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권을 엄청나게 강화했다.)

영국 역사학자 파커는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칼뱅'을 일컫어 "갈등과 충돌의 세상 안에서 태어나 질서와 평화을 바로잡은 자"로 평가했다. 칼뱅의 지칠줄 모르는 설교 활동과 성서주석작업은 천성으로 보나 신념으로 보나 보수주의자였던 그의 이론을 유럽에서 가장 혁명적인 이념으로 자리잡도록 이끌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루터가 독일을 위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면, 칼뱅은 유럽을 위해 종교개혁을 완성시켰다"라는 평를 받게 했을까? 먼저 '이론의 배경으로서 칼뱅의 고민'을 살펴본 뒤, '제도의 배경으로서 사회적 영향'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이론의 배경으로서의 칼뱅의 고민

칼뱅은 루터처럼 영혼의 시련을 겪지 않아서 일까? 칼뱅은 루터처럼 죄스러운 인간이 '자비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한 철저히 개인적인 고투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루터와 츠빙글리처럼 칼뱅도 깊은 신심의 인간이었거니와 그의 신심은 조금 다른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보다 나은 구원의 질서를 필요로 하는 '타락한 그리스도계의 죄스러움'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서'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는 그의 배경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데 칼뱅은 루터와 같은 수도자도, 츠빙글리와 같은 사목자도 아니었고, 주교를 위해 일하는 법률가의 아들이요, 그 자신도 법률을 전공했었기에 개혁의 방법에 있어서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종교개혁이 낳은 가장 빈틈없고 체계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인식과 인간의 자기인식을 축으로 하며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가 칼뱅의 신학을 완전히 움켜지고 있는데, 모든 것은 "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논지를 체계적으로 논증한다. 이것은 묘하게도 동시대 인물인 이냐티우스 료욜라의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원칙과 유사한 비교점을 제시한다. 그 대조점은 다음과 같다.

예수회의 창시자 료욜라에게서 인간은 처음부터 제도교회와 그 교회가 제공하는 구원의 수단 곧 성사들에 늘 온전히 매여 있는 반면, 칼뱅에게서 인간은 헤아려 알 수 없는 영원한 결정아래에서 하나님께 경외심과 맹목력 신뢰를 바쳐드려야 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은총의 수단은 아무 쓸모가 없기에 사제직과 비밀고해 또한 폐기되어야 한다. (왜  칼뱅이 신심과 문화에서 모든 감각적, 감정적 요소를 배제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칼뱅이 "하나님 홀로 영광을"을 외치며 언제라도 왕과 제후들에게 맞설수 있었다면, 료욜라의 "하나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는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인 교권제도적 교회와 함께 느낄 것을 요구했기에 교황과 주교들을 결코 비판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칼뱅의 '예정론'은 칼뱅이 왜 하나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인간의 일상적인 일(특별히 직업의 성실한 수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선택의 명백한 외적 표지가 되는 지를 유추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인류가 역사를 통해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갈라진 것은 홀로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의 결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직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선택되었음을 확신해야 했기에 세상 안에서의 금욕과 성실한 현세적 직업의식, 그리고 경제생활을 일궈내야 했다.

선택된 자들은 삶과 직업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투에 실로 적극적로, 때로는 영웅적으로 투신했다. 명상과 기도는 세상과 동떨어진 수도원 안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일상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칼뱅은 고/중세 때 세상 '옆'에 있는 수도자들의 정신적 귀족정치 대신, 이제는 세상 '안'에 있는 선택된 자들의 정신적 귀족정치로 전향을 일궈냈다)

2) 제도의 배경으로서의 사회적 영향
 
첫번째, 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처럼 사려깊은 사람이 이 칼뱅의 윤리 안에서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자본주의 정신"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전제조건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 것은 놀랄만한 일일까?
베버는 마르크스에 대한 역습으로 경제적 상황이 종교적 관점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종교적 관점이 경제 발전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뚜렷히 밝혀주었다. 베버는 이미 존재하던 자본주의의 가능성보다는 이 자본주의적 경제형태를 이용하는 새로운 '정신, 태도, 생활방식'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의식과 공동심성, 경제적 행동주의 성향을 일으킨 칼뱅파 신앙의 영향이었다.

카톨릭 윤리가 개개의 행위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한 경감, 면제에 집중했던 반면, 칼뱅의 예정, 선택설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 전체의 질서있고 윤리적인 '성화'를 요구했기에 칼뱅은 당시 성직자들의 호사와 일하려 하지 않는 귀족계급의 "죽은 자본"을 모질게 비난했다. 그리고 칼뱅은 의식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종교적으로 새로이 재평가했다. (노동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영예롭게 한다)

두번째, 칼뱅의 예정론이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듯이, 칼뱅의 교회제도 역시 간접적으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루터교가 본의 아니게 초기 국가 절대주의를 조장했던 반면, 칼뱅이 창시한 장로제적, 협의제적 교회제도는 절대 군주와 국가를 거부하는 자주적, 자치적 공동체와 사회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당시 츠빙글리는 루터의 개혁을 비판하며 명백히 비그리스도교적인 요소들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조리 철폐하여 사실상 전혀 새로운 교회제도를 지향해야 한다 주장했다. 이러한 바탕은 칼뱅에게 공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주교회가 아니라, 도시들이 자치하는 협의제로서의 개혁교회를 개혁하도록 하는 배경을 제공했다.)

전체적으로 보건데, 교권제도적, 중앙집권적 가톨릭 교회가 위계적-가부장적 특성을 지닌 정치-경제체제에 강한 친화력을 드러내고, 루터교가 공동체의 조직을 거의 제후들에게 맡곁던 반면, 칼뱅파의 장로제적-협의제적 교회제도는 연대적-연방적 체제와 친근했다. 이는 훗날, 미국으로 이주한 칼뱅파 신자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하나님이 새로 간선하신 계약백성으로 표현하며, 국가들의 세속화 과정을 견디면서도 발전한 대의민주주의 형태로도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정리. 종교개혁의 근본동인에 있어서 루터의 결정적 의의는 조금도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엄정한 논리와 의지, 명료하고 포괄적인 신학적 종합, 교회를 질서짓고 조직하는 재능, 국제적 차원의 교회 확장을 통해 개신교를 세계적 세력으로 만든 사람은 두말할 것이 없이 칼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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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볼 점 : 한스큉이 바라본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개신교 교회사가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근대와 종교자유, 그리고 프랑스 혁명으로 나아가길을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권력 국가와 제후들의 독재정치를 야기했고, 그리하여 근대화를 위한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를 조성해나갔다고 본다. p.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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