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 그리스도교 (8)

#. 한스큉, 그리스도교 (8)
 
4.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1. 권위의 전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이후, 종파주의 시기 참혹한 종파전쟁들의 형언할 수 없는 폐해 이후, 17세기 중엽에 유럽 역사 무게중심의 새로운 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지중해권(패러다임3-로마카톨릭)에서 유럽 중앙부(패러다임4-종교개혁)로의 이동이 아니라, 중부 유럽에서 서쪽 세계의 대서양 국가들(패러다임 5-근대)로의 이동이었다.

30년 전쟁과 그 종지부를 찍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종파분열 상황의 고착화를 낳고, 종파들의 질서원칙은 점점 무력해졌으며, 결국 종파들을 국가에 종속되는 하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다시말해, '종파들의 시대'는 '절대군주제 시대(1648-1789)'에 의해 교체되고 말았다.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으로 상징되는 탐험과 정복, 식민주의 정책도 같은 배경선 상에 있었다.)

*근대의 특징 중 하나 : 근대에서 관건이 된 전쟁은 중세적 패러다임에서 처럼 교황과 황제의 투쟁이나, 종교개혁적 패러다임처럼 가톨릭과 개신교의 싸움이 아니라,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들간의 전쟁이었다.

절대군주제는 수많은 내전과 폭동의 시대 속에서 평화(법과 질서)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만인에 만인에 대한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자연적 권리를 포기하고, 그것을 한 사람의 군주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홉스의 사회계약 이론이 근대의중앙집권적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을 낳았다. (홉스에게서 종교와 교회는 어디까지나 '통치 안정'이라는 목적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정치가 종교 위에 있게 되었다. 사회생활의 탈신학화와 탈종파화는 필수적으로 여겨졌고, 그 결과 더욱 강화된 군군주의, 관료주의, 중상주의가 시대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1) 계몽주의 : 종교에 드러워진 그림자.

근대의 혁명은 무엇보다도 정신의 혁명이었다. 자연과학의 혁명(갈릴레이-뉴턴)과 철학의 혁명(데카르트-칸트)는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의 권위가 지배하던 유럽 사회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중심위치를 차지했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지평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 세분화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신대륙 발견을 통해, 물리적으로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해, 갓 시작된 근대에는 수학, 자연과학, 새로운 철학의 대두가 갖는 의미를 통해)

* 지구가 태양주의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모델을 반박의 여지 없이 확증한 갈릴레이는 질량 실험을 도입함으로써 근대 자연과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바야흐로 자연법칙을 밝혀내고 언제나 새로운 영역을 넓혀나갈 자연에 대한 한계없는 연구의 토대가 확립되었다. 이에 더불어 뉴턴은 그 원리들과 다른 발견들을 터해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우주체계를 조리있게 제시했다.

**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상징되는 표어는 인간 개개인의 철학과 인간의 앎이 근본적이고 새로운 토대를 확립했음을 의미했다. 데카르트는 "외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를 첨예하게 구별함으로써, 근대의 주관과 객관의 대립, 인간과 자연의 대립의 토대를 놓았다. 본원적 확실성의 장소가 이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칸트 역시 전혀 다른 존재인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이성의 우악스런 전능에 대해 엄격한 한계를 설정했고, 하느님의 존재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에 매여있지 않는, 따라서 성찰의 대상의 되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적 인식으로 얻을 수 없으며, 성찰에 의존하는 판단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어쨋든, 계몽주의로 일컫어 지닌 시대정신은 외부의 권위들에 예속되어 있던 인간의 모든 사유를 풀어냈고, 자신의 바탕을 '이성'에 내재하는 고유한 원칙들에 두고자 했기에, 교회적 권위들을 단호히 배척했다. 인간 삶의 주요 영역 거의 모두(학문, 경제, 정치, 법률, 국가, 문화, 교육, 복지)가 교회, 신학, 종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이성적, 세속적, 현세적으로 변했고, 성숙해진 인간 자신의 책임과 관장에 맡겨져야 했다. 인간 세상 자체가 "세속적"이고 비종교적 세상이 되었다.

2) 사회의 혁명들 : 시민혁명

과학과 철학의 혁명적 운동들은 정치, 국가, 사회 영역의 혁명들로 이어졌다. 과연 계몽주의와 절대군주제는 서로를 떠받쳐주었으나, 사회적, 정치적으로 갈수록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되어가면서, 절대군제도 점차 강력히 배척받았다. 계몽주의의 문화혁명으로부터 정치적 혁명이 생겨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을 통한 '근대 민주주의 헌장' 선언은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강령적 이데올로기가 확립됨으로써 권력이 귀속되어야 할 곳은 계몽된 군주가 아니라 '국민(국민의회)'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교황 안에 체현된 중세의 신권정치(패러다임3) 대신, 개신교 지역의 권력 당국, 제후, 시의회(패러다임4) 대신, 근대초기의 계몽주의적 절대군주제 대신, 이제 근대 민주주의(패러다임5)의 국민의회가 체현하는 '국민'이 주권자가 되었다.

사회적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획기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교회 자체에게도 원하든 원치 않든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몇가지 근본적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온갖 축제, 의식, 신조, 규제, 행동양식을 갖춘 교회와 성직자 중심으로 꼴지어진 봉건사회와 하급 성직자들의 문화 대신, 이제는 세속화된 민주적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 문화는 자신의 정당성과 토대를 주권재민 원칙과 인권에서 찾아던바, 그 강력한 구현자는 의회, 언론, 정치 그리고 때로는 대중의 직접적 행동이었다.)

ii. 신앙고백문, 성사, 법질서, 관습을 골고루 갖춘 그리스도교 종파들 대신, 이제 부분적으로는 철저히 계획된 대항전략에 의해 일종의 '국가적 시민종교'가 생겨났다. (사도신경 대신 인권목록, 교회법 대신 헌법, 사제 대신 교사, 종교적 상징 대신 애국적 명칭, 그리스도도 윤리 대신 시민의 덕성과 사회적 조화를 증진시키는 계몽주의 윤리)

iii. 가톨릭 민중신심은 크게 쇠퇴하고, 대신 현저한 '탈그리스도교' 현상이 나타났다. (갈수록 막강해져 가던 근대적 동향들을 보면서 보수적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반근대적, 방어적 태도를 취하였다. 보수적 개신교는 축자적으로 이해된 성서에 몰두했으며(근본주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체제와 구조들을 더욱 중앙집권화, 관료주의화 했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성화하기(무류설) 하였다.)

3) 새로운 이데올로기 :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프랑스혁명의 충격 이후 낭만주의와 정치적 복고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근대의 개선행진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계속되는 저항운동들은 이제 대부분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의해 떠받쳐 졌으니, 그 중 하나가 '자유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였다.

*자유주의는 국가정치적으로는 온갖 절대 군주제적 국가권력에 맞서 개인 자유권의 수호와 헌법에 의한 공권력 제하을 위해 노력했고, 경제정책적으로는 경제, 사회 영역으로부터 국가의 후퇴와 생업, 통상, 기업, 경쟁, 단결의 자우에 대한 인정을 얻어내고자 애썻다.

**사회주의는 인류역사 전체는 경제적 하부구조에 터하여,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변증법적 계급투쟁의 역사로 이어진다고 세계를 이해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마지막 단계, 즉 후기 자본주의 단계에 자본과 노동의 대립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결되며, 마침내 계급 없는 사회가 이른다고 생각했다.

정리하자면, 1870년까지의 유럽 역사가 무엇보다도 자유롭고 입헌적인 국민군가 질서 확립을 위한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투쟁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그 후부터는 자본주의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적 투쟁이 갈수록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해서 이제 갈수록 관건이 되었던 것은 그저 개인의 자유(자유주의의 근본 관심사) 대신 사회정의(사회주의의 근본 관심사)와 그와 결부된 하나의 다른, 보다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쫓았다.

그렇다면, 종교(교회)는 이런 맥락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까.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에 의한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읜 급속한 발전과 새로운 인문과학(심리학, 사회학)으로인간사회의 근본적인 법칙들을 규명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해 세계사, 교회사, 신학사의 온갖 문제들에 대한 권위를 재검토 받아야 했다. 다시말해, 계몽주의로 시작된 계혁은 점차 유럽교회내 탈교회화를 가속화 시켰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자들도 대부분 계몽된 합리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었거니와, 이것은 그리스도교에 대놓고 적대적이진 않더라도 별 관심없는 영역이 되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자연과학-특별히 다윈 진환론- 역시 이성과 과학, 진보와 민주주의, 민족과 인간성에 대한 신앙을 역성들었으며, 이 신앙은 너무나 쉽사리 종교적 무관심, 불가지론 혹은 아예 단호한 무신론과 결부되었다.

여기서 세속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터해 살아내는 속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세속주의였던바, 이것은 전통적인 종교를 인간의 자기소외로서 경멸했고, 종교적인 것은 무엇이든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반대하게 만들었다. 어쨋든, 종교(객관적 제도로서의)든 종교성(주관적 태도로서의)이든 더이상 인간의 삶 전체를 규정하지는 못했고, 개개인에게 그럭저럭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특수한영역이 되어버렸다. 종교는 학문, 법률, 정치, 예술과 함께 사회의 거대한 총체적 구조 안의 "하부구조"로서 위치지워졌다.)

결론적으로, 근대에 맞선 교회들의 이론적, 실천적 대항 계획은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어야 했고, 계시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본질에 집중해야만 한다는 것을 고집했다. 말하자면 교회들은 사회적 변혁의 실체, 근대 세계를 실제로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였다. 교회들은 온 세상이 그 변혁에 급습당하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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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신사, 사회사적 운동에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한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성과 진보에 대한 새로운 신앙(근대의 주도가치)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i.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에서는 최고의 권위가 "교회 내지는 교황"이었고, 종교개혁의 패러다임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패러디임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최고의 권위였다.

ii. 불변적, 정태적, 위계적으로 틀지어진 영원한 세계질서 대신, 하느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에 관한 종교개혁가들의 두 왕국 교설 대신, 이제 끊임없는 "진보 의식"에 입각한 새로운 통일적 세계관, 역사관이 득세하게 되었다.

iii. 특별히 성서연구에 있어서, 종교개혁적 패러다임으로부터 근대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뚜렷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비평 성서학이었다. 여러세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개념, 동기 전승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아울러, 본문, 문헌, 양식, 장르 비평을 통해 포괄적이면서도 면밀한 작업을 하면서, 성서의 하나하나의 문헌 구절, 낱말을 붙들고 합리적 성서비판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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