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 그리스도교 (10)

 #. 한스큉, 그리스도교 (10)

5. 포스트모던 일치운동 패러다임

1차 세계대전 이후 계몽주의를 떠 받치던 근본적 가정들은 계몽주의 자체에 의해 크게 흔들렸다. 계몽주의의 자기확신은 이율배반의 방식으로 증발해버렸다. 근대의 방법론적, 합리적 사유뿐 아니라 직관적, 통전적 앎, 느낌, 감지, 체험도 중요시 여겨졌고(이성중심가치 비판), 근대의 진보자체에 1순위로 내재된 작용으로서, 인간의 자연환경 파괴와 사회문제들은 또 다른 엄청난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다.(진보중심가치 비판) 자유주의와 사회 또한 면목을 잃었으니, 자유주의는 사회정의를 창출할 수 없었고, 사회주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다.(국가중심가치 비판)

어쨋든 두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시대(패러다임5)에 들어섰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스큉은 이후의 시대를 "후현대(post-moderne)"이든 "탈현대(nach-moderne)"에 관해 말하고 싶어하든 상관없이,우리는 앞선 시대와 구별해주는 것을 찾아내기 위한 발견적, 모색적 개념으로 시대를 명명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며 다양성이 근본적인 사회 합의 추구를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보존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탈교파 일치운동'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저런 '교파적' 패러다임의 흔적들도 여전히 눈에 띌 것이나,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새로운 일치운동적 종합 안으로 지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한스큉이 제시하는 세가지 근본태도에 대한 제안은 우리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첫째, 누가 "정통적"인가? 패러다임2 분석에서 밝혀주었듯이, 올바른 가르침, 참된 교리를 특히 중시하는 사람이 정통적이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진리이기에 각자(그리스도인, 주교, 교회)의 임의에 내맡겨져서는 안되는 '진리'이기에, 전체 교회의 충실한 '전승'을 통해 새로운 세대들에게 언제나 다시금 창조적으로 전해지고, 살아내져야 하는 것을 각별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꼴지어질 것이다.

둘째, 누가 "가톨릭적"인가? 패러다임3 분석에서 밝혀주었듯이, 가톨릭 교회, 다시말해 전체적, 보편적, 포괄적, 총체적 교회를 특히 중시하는 사람이 가톨릭적이다. 구체적으로, 온갖 단절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견지된 신앙과 신앙공동체의 시간 안에서의 연속성과 그것들이 공간안에서 보편성을 띄는 것을 각별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꼴지어질 것이다.

셋째, 누가 "복음적"인가? 패러다임4 분석에서 밝혀주었듯이, 교회의 모든 전통, 교리, 실천들 속에서 복음(성서)에로의 끊임없는 회귀를 특히 중시하는 사람이 복음적이다. 구체적으로, 복음이라는 규범에 따르는 끊임없는 실천적 개혁을 각별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꼴지어질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 "정통적", "가톨릭적", "복음적" 근본태도들은 결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태생 정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도 참으로 복음적일 수 있고, 태생 개신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도 참으로 정통적일 수 있으며, 태생 개신교 신자와 정교 신자 역시 참으로 가톨릭적일 수 있다. 과연 이미 수많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복음에 터한 참된 일치운동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참된 그리스도의 실존은 오늘날 일치운동적 그리스도인 실존을 의미한다.

나사렛 사람의 "영"은 인간, 제도, 구조들의 무능과 거부를 이겨내고 언제나 다시금 자신을 관철할 수 있었거니와, 그런 곳에서는 언제나 말뿐 아니라 실천으로 참된 추종이 발생했었다.
고대교회에서 궁정 신학자나 주교들과 나란히 수도자와 성인들이 존재했고, 인노켄티우스 3세와 보니파키우스 8세 옆에는 아씨시의 프란체스크과 있었으며, 레오 10세와 함께 마르틴 루터가 존재했고, 대종교재판관들과 나란히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테레사가 있었으며, 프랑스 절대왕정 한 가운데에 블레즈 파스칼이 있었고,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할 때 케텔러 주교가 있었으며, 소시민적 문화 그리스도교와 나치즘에 대한 저항 안에 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고 알프레드 델프가 있었다.
널리 알려진 이 사람들 외에도 교회사 어디에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바로 그들이 사실 그리스도교의 숨은 힘과 참된 역사를 이루었다. 그들에게 힘차게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영이 아니라, 거룩한 영, 곧 하느님의 숨과 힘과 권능이었다. 하느님의 영은 믿는 이의 마음 속에 현존하고, 또 그렇게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현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3천년기에도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 영과 믿음의 공동체에게는 독특한 종류의 '무류성'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바랄 수 있다. 이 '무류성'은 이러저러한 권뒤르의 특정한 상황에서의 잘못을 저지르거나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따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인 공동체는 온갖 잘못과 오류, 죄와 패덕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굳건히 머문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한스큉은 그의 책 말미에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맺는 말을 대신한다. (아마 이 또한 일치운동의 패러다임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반증을 강조하며 마친 거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가 이책 전체에 걸쳐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철저한 모형적 변혁은 언제나 복음에 근거해서, 복음을 위해서 일어날 뿐이지 복음에 반대해서 일어날 수는 없다. 복음자체가 불연속의 근거일 뿐 아니라 연속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 계획이나 일이 사람들한테서 비롯된 것이라면 없어지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물론 그들을 없앨 수 없을뿐더라 자칫 여러분 스스로 하느님의 적대자가 될 것입니다"(행5: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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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점.

정통적, 가톨릭적, 복음적에 대한 한스큉의 해설이 에큐메니칼하기에 이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일정 부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함께 곱씹어 생각해 봐야할 점은 지속적 영향력을 지닌 현대인의 경험들과 발견한 결과들은 신학의 변혁(20세기 이전과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한스큉의 또다른 책 <현대 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통해 그 논지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현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을 아쉬운대로 대신할까 한다.

1) 코페르니쿠스에서 다윈과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현대 자연과학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지위, 세상의 창조와 진환, 그리고 창조자와 진화를 일으킨 자를 전혀 다른 빛에서 보게 하였다.

2)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서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비판이론에 이르는 현대철학은 인간의 이성, 자유, 역사성 및 사회성뿐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성과 세상성도 새롭게 이해하게 하였다.

3) 미국의 독립선언과 인권선언 그리고 프랑스혁명과 함께 시작된 현대 민주주의는 개인적 자유, 인권, 사회정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렀으며 또한 국가, 사회 그리고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렀다.

4) 언제나 종교는 반인간적 소외(포이에르바하), 불의한 사회구조의 강화(맑스), 인간의 도덕적 비하(니체) 그리고 인간의 유아기적 퇴행(프로이트)을 위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 현대적 종교비판은 폭로했다.

5) 특히 19세기 이래 현대적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인간, 그의 심리(의식과 무의식), 그의 행태, 그의 사회성을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토마스 또는 마틴 루터의 시대와는 전혀 다르게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6) 스프노자, 시몬, 베일리 이래, 라이마수트, 레싱, 세믈러, 슈트라우스 이래, 현대적 주석과 역사학은 이스라엘 역사와 나자렛 예수뿐 아니라 교회사 교리사를 비판적으로 새롭게 이해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7) 여성, 유색인종, 그리고 제3세계가 온전히 정의를 누리도록 하기위해 현대의 해방운동들은 이미 19세기에 순전히 형식적인 자유에 대항하여, 성차별 및 불의한 사회구조에 대항해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항해서 투쟁하였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결험들을 비판적-건설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학만이 현대를 위한 신학일 수 있다. 새로운 신학적 모형의 지평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양면적, 우발적, 가변적)이어야 하고, 척도는 그리스도교의 복음(근원적, 토대적, 시원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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