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 그리스도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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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2. 슐라이어마허

1) 배경: 종교에 신물이 난 시대에 종교를 위해.

이성과 진보로 정향된 근대에서 종교는 배척과 조롱, 경멸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문화 속에서도 종교적 확신이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님을 근대의 언어로 보여주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였다.

그는 철두철미 근대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칸트, 피히테, 헤겔과 더불어 도전적 정점에 이른 근대철학을 긍정했고, 또 잘알고 있었으며, 역사적 성서비판 또한 긍정했고, 스스로도 그것을 성서 문헌들에 적용했다. 하지만 그의 유명한 처녀작 <종교에 광한여, 종교를 경멸하는 식자들을 위한 강의>에서 그가 전녕 하고 싶은 말은 오늘날에도 인간은 근대적이면서 또한 종교적일 수 있으며, 비판적이면서 또한 경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종교와 신학의 상황은 암울했다. 저명한 동시대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학으로부터 철학으로 넘어갔으며, 종교를 아주 내버리지는 않았으나, 자신들의 사벽적, 형이상학적 체계속에 종교를 편입시켜 버렸다. 혁명과 복고,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사납고 어지러운 시대에 "종교는 당신에게 무엇인가?"라는 곤란한 물음에 대해 슐라이어마허처럼 인상적이고, 진지하고, 공공연하고, 효과적으로 호소했던 사람은 교회와 신학 현장에 없었다.)

슐라이마허에게 '종교의 독자성'은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철학적 사변(관념론적 심미학으로 존재)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노력(칸트의 정신에 다라 도덕적으로 존재)으로 편협하고 악의적이고, 박해에 걸신이 들린 것처럼 만든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에 대한 반성-형이상학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왜냐하면 종교적 인간의 '종교'는 체계화, 이론화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실천도, 사변도 아니었고, 예술도 학문도 아니었다. 그에게 '종교'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감수성과 영원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감동됨이었다.

*슐라이허마허가 말한 "감정"을 심리학적인 좁은 의미에서 낭만주의적 열광적 감격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유와 행위에 우선하고 그것들의 바탕에 갈려 있는 실존적, 통전적 의미에서 그것은 직접적, 종교적 자의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슐라이허마허는 이 사상을 나중에 보다 정확한 단어로 표현했고, 오해 받기 쉬운 삼라만상에 대한 "직관"이라는 개념을 철회하고(사실 인간은 삼라만상 전체를 직관할수는 없기에), 대신 직관과 인식을 아우르는 "느낌"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의 저서 <신앙론>에 이르러서 비로소 종교를 '인간의 절대적 의존 감정'이라고 정리했다.

정리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에서처럼 세상과 자연을 초월한 존재 안으로의 '이탈'이나 '건너감'이 아니었으며, 이신론이나 계몽주의처럼 세상 '배후의 존재'나 '형이상학적 존재' 안으로 들어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적으로 이해하건데, 유한한 존재 안에서 무한한 존재를 예감하고, 직관하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었다. (피히테, 셀링, 헤겔과 마찬자리로 그역시 철학적 엄정성을 터해, 하느님을 인간화하는것을 '철저히 배격'했다. 하느님은 근대적으로 이해하건데, 모든 존재, 인식, 의지에 있어서 내재적-초월적인 '궁극 근원'이었다.)

2) 오해

i. 인간학으로의 해체?

슐라이어마허는 수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다. 에밀브루너를 따르면 그는 인간 밖에서 다가오는 성서 말씀 대신 '감정'이라는 말없는 내면성으로 출발한다고 비판받았고, 바르트에 따르면 그는 신학의 인간학화와 주관주의화를 꾀했다고 비판받았다. 그리하여 포이어바흐가 신학을 인간학 안으로 지양하고 해체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 슐라이어마허였다는 평가는 옳은가?

한스큉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반성은 인간의 주체와 자기체험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신학의 주관주의화와 인간학화로 귀결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그의 초기 저작에서 말해주듯이 감정을 본질로 하는 종교없이, 근대시대가 사유나 행위로 인간 모든 것을 중심화하여, 치명적인 병적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즉, 삼라만상 안에서 오직 인간을 모든 관계에 중심점으로 두는 욕망에 대한 경고로 종교를 제시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종교의 고유하고 참된 "대상"은 유한한 존재 안에 드러나는 무한한 존재, 신적 생명과 행위였다.(그래서 그는 '인격적인 하느님'보다는 '살아계신 하느님'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인격적으로 표상되건 아니건, 종교적 의식은 압도적이고, 지고하고, 궁극적인 어떤 힘을 감지하거니와, 종교적 영감이 풍부한 사랆들은 특정한 순간들에 그 힘과 하나됨을 느낄 수 있지만, 실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범신론자도 합일 신비주의자도 아니었던 슐라이어마허는 스피노자식의 일원론과 결정론도 단호히 배척했다. 그러므로 슐라이마허의 입장을 구태여 하나의 딱지를 붙여 이해하고자 한다면, 범신론이 아니라 "만유신재론"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것이다.

ii. 심리학으로의 해체?

슐라이어마허의 의식 그리스도론은 처음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의 인식과 감정의 한 양식인가?", "혹시 그리스도론이 심리학 안으로 해체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결국 무시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슐라이어마허의 근대적 신앙론은 중세의 대전들이나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 교의학과 달리 접근했던 근대 시대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근대 이전에서 신앙은 우선적으로 특정한 객관적 계시사건들 혹은 신앙진리들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성서주의와 이성주의를 반대하여 말하건대 철저히 역사적으로 정향되어야 했다. 이른바 시간을 초월하고 불변하는 그리스도교 교의에 관한 학문을 할 수 없는 풍토에서, 어떤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정 시기에 통용되고 있었던 종교적 체험과 결부하여 교의학을 풀어보고자 했다.

슐라이어마허의 목적은 교회공동체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내적 본질에 터해 비판적, 조직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의미에서 슐라이어마허 <신앙론> 목차는 그의 의도의 반영이다. 서문은 우선 종교와 종교적 공동체에 관한 이론의 근본특징들을 서술-윤리학의 보조명제들-하고, 다음으로 역사적 종교들의 차이점들을 지적-종교철학의 보조명제들-한후, 끝으로 그리스도교와 개신교 신앙의 본질규정-호교론의 보조명제들-으로 정리함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변증한 것이다.

물론 슐라이허마허가 계몽주의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순전히 이성적 척도들이 아니라 종교적 척도들에 따라 대대적인 탈신화화 작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탈신화화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론과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예수론의 차이점은 매우 뚜렷했다. 살펴보면 그는

"그리스도는 역사자요, 인간은 수용자다.(그리스도는 당신 은총을 통해 죄의 권세를 정복하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인간과의 생명공동체 그리고 인류 안에 보다 차원 높은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모로 불확실한 그리스도의 개별적 특징이 아니라, 계속 작용하는 그의 인격에 대한 '총체적 인상'이다. 이 역사적 인격은 전범적 완전성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그는 인간이 본받으려 노력해야 하는 본보기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사로잡고 꼴짓는 '하느님 의식 원상'이다."

라고 주장하며, 요컨데 구원자의 역사적 인격이 구원의 궁극 근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분이 당신의 절대적 권능과 함께 예수의 자의식 안에, 그것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현존한다.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 의식은 그야말로 그의 인격을 꼴짓는 원리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하느님 의식은 순정하고 참된 계시로, 아니 유한한 존재 안의 하느님 존재의 실제적 내재로 이해되어야 하고, 신앙인은 여기서 하느님의 존재를 요청적으로 가정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 안에 생생히 작용하는 신적인 것을 인식한다고 보았다.

*슐라이허마허는 그리스도교를, 당시 계몽주의 신학에서 흔히 그랬듯이, 어떤 윤리적 이상의 모방으로 이해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교의적 명제들의 군말 없는 수용으로 이해하지 않고, 역사의 예수와 그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에 의해 속속들이 규정된 '실존'으로 이해했다. "말씀이 살이 되셨다'는 말은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그야말로 '교의학 전체의 근본 텍스트'였다.

3) 유념할 점

슐라이어마허의 매우 근대적인 그리스도론이 오늘을 위한 그리스도론이 될수 있는가? 이에 대해 한스큉은 몇가지 유념할 점을 제시한다.

첫째, 구원에 관한 우리의 체험이 예수의 이야기에 의해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영감을 얻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비판수정되는 대신, 오히려 우리의 체험이 예수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의 여지가 있다.

둘째, 그의 이상주의적 현실 해석과 조화로운 근본 정조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실증적 체험을 거의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 소외, 자기분열, 고통, 죄책, 좌절, 역사의 모순과 재앙등이 하느님의 구원 결의 안으로 통합 지양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그는 체계화 작업에서 예수의 예언직, 대사제직, 왕직에 관해 서술했으나, 그렇게 함에 있어 신약성서 문헌들의 근본바탕인 십자가의 걸림돌과 부활의 희망에 가운데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가 인간들과 하느님께 버림받은 사실을 참으로 절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순전한 사랑을 지닌 이상적 인물이 육신적 현존으로부터 영적 현존으로 단절없이 옮겨간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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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점.

i. 칼바르트 이래 많은 신학자들이 슐라이어마허가 자연신학을 전개했다는 비난에 대해 다음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가 생각하는 자연종교라는 것은 이성의 도덕적 정향의 소산이라 생각했으며, 이성 종교를 벗어나는 것은 모두 미신으로 배척했다. 슐라이어마허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확신은 종교는 그저 "일반적으로" 고찰하지 않고, 개별적이고, 생동적이여야 하며,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종교안에서 고찰할 때에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자연-이성 종교는 철학적 반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참된 종교의 특징인 '생동력'과 '직접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하고자 하는데 초점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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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바르트는 1946년 슐라이마허에 관한 글에서 "인간중심적 '고찰방식의 전도'가 반드시 '비신학 혹은 반식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며 그의 입장을 일부 수정했다. 이처럼 슐라이어마허는 시험에 대한 응답으로 전통적 교의학을 공부해야 했지만, 그것을 혐오한 그는 의식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선택하려했다. 방법론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종교를 경멸하던 식자층에게 그들이 발디디고 있는 세상 안으로 마중나가서, 그들의 오해에 맞서 종교에 대한 참된 이해를 널리 부각하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신학 특유의 개념 사용을 삼갔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그것들을 재해석했다. 그는 동시대 식자층이 알아듣던 '하느님'이라는 말 대신 '삼라만상', '무한한 존재', '거룩한 존재' 같은 낱말들을 즐겨 사용했으며, 개념들이 동시대인들에게 덜 부담스럽게 다가갈수록, 더 설득력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계시와 무관한 자연종교의 주창자로 오해받을 여지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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