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 그리스도교 (7)

#. 한스큉, 그리스도교 (7)
 
4.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iii)종교개혁의 그림자


마르틴 루터가 사망한 뒤, 그리스도계는 각양각색의 진영들로 갈수록 대립하고 분열되어 나갔다. 카톨릭, 극단/근본 루터파, 개혁파 등 바야흐로 '종파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학자 에르스트 체론은 이를 "신앙 분열 이후 따로따로 애쓰던 그리스도계의 여러 신앙고백 진영들이 교의, 교회제도, 종교적-윤리적 생활방식에 입각하여, 안정된 교회로서 정신적, 제도적으로 고착화되어가던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다시말해, 본디 전통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개신교도 행정, 교회법, 신앙고백문, 전례가 완비된 뒤에는, 고유한 전통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흥기, 개혁, 주창의 단계에 이어 조직과 관철, 그리고 공고화 단계가 뒤따랐던바, 이것은 안전과 보전 그리고 고착화를 낳은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의 비순응주의를 뒤 따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계승자들의 순응주의였다.


(*신앙고백문은 논란이 되는 문제들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일치의 표지였지만, 외부적으로는 다른 진영들과의 구별의 표지였으니, 논쟁들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튼튼한 보루가 되었다. 카톨릭 신자들이 트렌트 공의회의 교리서와 교령들을 갖고 있었듯이, 루터파는 일치서 등의 신앙고백 문헌들로, 개혁파는 제네바 및 하이델베르크 교리서 등의 신앙 고백 문서들을 금과옥조로 떠받들었다.)


그러므로 루터파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적 배경이 전체적으로 보건대, 성서 메시지, 복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 바탕은 오히려 축자적으로 받아들인 성서구절들이었으니, 그것들은 신학논쟁에 있어 아주 특정한 교리 문제와 결부되었고, 폐쇄된 철학적, 신학적 체계 안에서 끼워넣어져야 했다. 일종의 '성서주의'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행태는 '로마교황의 무류성'을 종이로된 교황이라는 '성서의 무류성'으로 대체하여 맹신하도록 하였다. (정통주의자의 수호자와 해석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엄격한 생활을 중시했고, 성서 그대로에 담겨있는 순수교리 수호에 진력하였다.)


1) 경건주의


종교개혁 패러다임의 교조적-제도적 상황의 경직화에 맞서,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경건주의'는 경직되어버린 개혁의 패러다임에 새로운 신심운동을 일으켰다. 그 대표적 인물로 '야콥 슈페너'를 들 수 있는데, 그의 근본 관심사는 의인도, 말씀과 성사도 아닌 인간의 변화에 있었다. 슈페너는 그리스도인 실존은 의롭다는 법률적 판결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고, 영적으로 체험하는 새 생명으로서의 '중생'과 행동으로 실현되는 '성화'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슈페너는 새로운 교설을 선전하려 하지 않았고, 새로운 삶, 철저한 실존적 전환, 실천적으로 살아내려는 충심의 신심 그리고 사회적 영역에의 투신을 선포했다. 슈페너의 궁극적 관심사는 한마디로 개인들의 변화를 통한 사회의 변화이었다. 슈페너로 시작된 경건주의는 할레의 프란케, 헤른후트의 친첸도르프로 이어지면서 북서, 남부 독일로 신속히 퍼져나갔고, 더 나아가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동유럽 그리고 마침내 북미(대각성운동)에까지 전파되었다.


(** 특별히 헤른후트의 친첸도르프는 슈페너의 이상-교회는 구원의 기관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형제자매들의 공동체이다-을 실현하기 위해, 고유한 제도와 예배를 갖추고, 매사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종파를 초월한 공동체 "갱신된 형제회"를 창설했다.
할레와는 달리 감성적인 신심을 중시했던 이곳에서는 참회와 속죄보다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화해,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 그리고 형제들의 친교를 강화하는 새로운 형식의 얘배를 강조했다.
참고로 감리교 창립자인 존 웨슬리는 북미 조지에서 이 형제회를 처음 알게되었는데, 그 후 웨슬리는 런던 형제회의 저녁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서문 해설을 읽던 중 회심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경건주의(생동하는 내면화된 신심, 갱신된 그리스도교적 삶의 실천, 그리고 교육-자선 사업에의 열정적 헌신)는 주관적-개인적 측면과 그리스도교의 실천적-도덕적 지향을 강조하면서 종파주의의 한계를 극복했고, 여러 종파가 공유하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경건주의(전통주의적 성서적 표상들과 그리스도교적 내용을 생생히 보존하고자 했던 경건주의자)는 정신적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새로 도래하는 근대의 자연과학적, 철학적 세계관 및 근대적 패러다임과의 비판적 대결을 일체 거부했다. 새로운 시대에 물려받은 유산을, 새로운 정신에 터해 다시금 획득하려 못하고, 지키는데 몰두한 것이다.


2)  근본주의.


지금까지 살펴본 경건주의적 개신교의 대부분은 20세기에 들어, 교회들을 결합시키는 일치운동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슬프게도 배타적인 근본주의로 나아갔다. 물론 즉시 덧붙어야 하는 사실,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가 모두가 근본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근본주의자이고, 어떤 배경에서 발생하게 되었는가? (많은 보수적 개신교인들, 경건주의자들, 영국 국교들이 자신들의 보수적인 종교적 근본입장과 현대의 사회, 정신, 종교사에의 개방성을 온전히 결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근본주의의 토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서의 '무류성' 혹은 '확실성'에 대한 신학적 공격과 방어의 불가피성 때문에 뜻하지 않게 발생했다. 그들(성서의 축자영감설과 그것에 터한 절대적 무류성을 고백하는 사람)은 합리주의, 진보주의, 다원주의, 물질주의, 세속주의와 동일시 되는 '현대'의 역사적 연구(역사비평)에 터해 성서의 권위를 상대화하고, 하나님에 의한 인간 창조(다윈의 종의기원)를 문제 삼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순전히 인간적 차원으로 축소, 환원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 했다.


(***특별히 개신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새 시대 속에서 나타난 근본주의적 태도를 두고 "오늘날 '근본주의'라고 지칭되는 모든 논의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가장 중대한 중교적, 간종교적, 비종교적 도전은 '근본주의'로 부터가 아니라 '현대세계'로부터 온다"고 말했다. 이말인즉, 배타주의적 유다교와 지상주의적 이슬람교, 그리고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의 목표는 결국 '전통신앙을 위협하는' 현대에 대한 반란이고, 예전의 종교, 정치, 경제적 상황을 '복원'하기 위해 기꺼이 현대성을 '정지시키려는 시도'라 보았다.)


이처럼, 근-현대의 학문, 사회, 성서주석, 신학에 대한 단호한 배척으로부터 개신교 근본주의가 생겨났다. 현대로부터의 위협에 맞서 성서의 축자영감과 무류성을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근본주의는 그릇된 저항 안에서 경직되어 버린 개신교의 위험성을 뚜렷히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근본주의는 로마와 교황 지상주의에 대해서뿐 아니라, 현대의 바빌론, 진화론과 자유주의, 세속주의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대화없이 저항(진리전체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주장)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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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볼점
1. 경직화와 고착화.
종교개혁의 교회들 안에서도 전에 생동하던 '전통'이 '전통주의'로 굳어지고, 본디 생동적이던 패러다임이 화석화되었다. 고대 패러다임 안에 동방정교회 전통주의가 '참된 정교 전통과 구별해야 한다'면서, 중세 패러다임 안에 로마 가톨릭 전통주의가 '참된 가톨릭 전통과 구별해야 한다'면서, 이제 종교개혁 패러다임 안에 개신교 전통주의가 '훌륭한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과 새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경직화와 화석화를 만들어냈다.


한스큉은 불연속적으로 보여지는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도 '복음'이라는 깊은 연속성은 유지된다고 말했다. '근본주의 없이도 근본바탕을 지켜낼 수 있고, 배타주의 없이도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고, 광신주의 없이도 종교적 확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근본주의는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라는 그의 일침은 붙잡아야하는 것은 '전진하는 시대'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일치와 개혁은 모든 교회가 단 하나인 그리스도교 전통,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에 다시금 집중할 때 생성, 실현될 수 있다.)을 요구하고 있다.  


2. 가톨릭 교회의 변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종교개혁과 반근대주의 안에서 완전히 경직되어버린 것처럼 보이던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전환을 성취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령들은 개신교의 일련의 핵심요청들(성서존중, 참된 전례, 평신도의 재평가, 민중신심의 개혁등)을 적어도 원칙적으로, 그러나 또한 아주 실천적으로 수용했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태도를 취하였는데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1)교회 분열에서의 가톨릭 측의 공동책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끊임없는 개혁의 필요성도 명시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2)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이제 교회로 인정하고 있다 : 모든 교회 안에 공통된 그리스도교적 바탕이 존재하거니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및 세례와 함께 주어져 있으며, 교회들을 갈라놓는 모든 요소들보다 중요하다.
3)가톨릭 교회 전체가 일치운동적 자세를 요구받고 있다 : 가톨릭 신자들 자신의 내적 전환, 교회들을 상호이해와 서로를 배우려는 대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세례, 가치관들에 대한 인정, 끝으로 일치운동의 정신에 터해 수행되는 신학과 교회사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의 요청들에 대해 새삼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방향을 전향하고 있다. 온갖 종파주의적 불확실성을 이겨내고, 이데올로기적 광신과 증오를 내포한 편협함을 극복해야 하는 성찰은 사실 개신교에 더 절실하지 않은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것에 함의된 의미는 '배타적' 우월성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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