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없는 믿음의 종교

바디우에게 '진리'는 경험적이거나 명제적인 진리가 아니라 새로운 것의 질서, 창조의 질서를 뜻했고, 라캉에게 '진리'는 지식안에 구멍을 내는 어떤것 이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현대는 '사실과 지식'의 영역을 일찍감치 제쳐두고 '사건과 현존'안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의미'라는 종교를 믿는다는 현대세계에서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이야기 해야할까?(혹은 무엇을 믿고 있는 걸까?) '믿음'이란 단어는 그리스도인들만 명명하는 고유어가 아니다. 현대인들도 새로운것이 도래하도록 낡은 것들을 재해석하고, 심지어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기 일쑤니 말이다. 오히려 그 모험은 무모함이 아닌 주체적 자기실현과 헌신이었기에 용기있는 결단으로 불리는게 마땅할 것이다. 또한 이는 개인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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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뇌가 기능을 상실하더라도 습관은 몸에 남아있다고 한다. 좋은습관은 지각이성이 죽어서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세상의 습관도 이정도인데 경건의 습관은 어디까지랴. 시공의 제한을 넘어 영원과 접붙임을 창조한다. 우리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현재에 삶속에 송두리채 구현된다. 그것이 지각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영혼은 그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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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종

ㅡ. 종교적 인간과 참 그리스도인. '추종'에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위인들의 제자 혹은 지지자와 구별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과 '새 삶'이 곧 예수 자신의 궁극 목적으로 주어져 있다. (...)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인 복음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새 삶에 비추어서야 비로소 그 참뜻이 이해된다.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예수 자신과 분리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란 없다. (...) 따라서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시는 것은 막연한 경배나 신비로운 결합 또는 글자 그대로의 모방이 아니라 각자의 실천적-인격적 '추종'이다. - 한스큉. 왜 그리스도인 인가. p319 부분 발췌. (종교적 앎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에 대해서 기말소논문을 써보려다가 발견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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